[영화] 스노든(Snowden, 2016)

https://t1.daumcdn.net/thumb/R1280x0/?fname=http://t1.daumcdn.net/brunch/service/user/1lcG/image/CDlcJKKujW9xbzeeF3o9TdwADts.jpg

영화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부당한 정보수집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전기 영화다. 스노든이 미국, 일본, 하와이, 홍콩에서의 활동들과 그 이면에 숨겨진 사랑과 도덕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폭로에 이르기까지 행했던 다양한 정보수집 활동들의 위법성 또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규제되지 않은 권력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국가안보국을 향한 미약한 규제는 그들이 음지에서 국가 권력의 칼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XKeyscope와 같은 초법적 감청 프로그램들은 간단한 사후 승인만을 필요로 했고, 이 것은 해외정보감시법원(FISC)의 거수기 역할로써 합법화 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 권력은 광범위한 시민 감시를 통해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면서도 합법화 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의 무결을 주장하며 광범위한 시민감시를 옹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인에게는 합법적이지만 숨기고자 하는 사생활이 모두 존재한다. 그냥 가볍게 생각해봐도, 본인이 옷 갈아입는 영상을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이건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인격체로써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 권력이 개개인의 합법적인 사생활을 파해쳐 몰래 보고있는 것은 ‘국가 안보 수호’가 아니라 ‘스토킹’이다.

더하여, 국가기관들은 종종 ‘더 큰 공익’을 위해 개개인의 작은 사생활 희생하는 거래를 하는 것 뿐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생활 침해를 대가로 국가 안보를 보장받는다는 거래에 관해 통지받은 바가 없다. 거래 상대방에 대한 통지도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국가 안보를 보호하고 싶었다면, 일련의 거래에 관해 시민들에게 법안 상정나 개정시에 매스컴에 통지하였어야 했다. 이를 통해 적절한 견제를 통해 조율을 과정을 거쳤어야만 한다.

얼마전, 우리나라의 ‘테러방지법’이 국가정보원의 초법적 정보수집 활동을 용인하는 것인가에 대해 법안 발의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견제과정을 거쳐 일부개정이 이루워져 발의가 되었다. 이는 서로 간의 통지와 조율과정이 있었음을 의미하고, 국가정보원 또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국가 권력 행사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미세한 국론 분열은 남아있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의 폭로 행위를 넘어,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가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결국은 사람이 잘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안보가 위협당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자유가 위협당해선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 중간점을 찾아나가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스노든의 폭로는 안보에 과도하게 쏠린 불균형을 깨트리고자 했던 일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 파운더(The Founder, 2017)

 

the founder pos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If I saw a competitor drowning, I’d shove a hose down his throat.”
“내가 만일 경쟁자가 익사하는걸 본다면, 난 그의 목에 호스를 꽃을꺼야.”

사실, 영화를 본지 한달이 된 시점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그저 영화를 보며 느낀걸 두서없이 써봐야겠다. 차라리 이런 영화평이 쓰기에도 편하고 솔직한 편이다.

영화 <파운더>는 20세기 사회에서의 성공담을 담았다. 성공담은 ‘역경을 이겨내 승리를 쟁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데, <파운더> 역시 동일하다. 끝없는 야망으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은 창업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진부할수도 있는 전개이지만, 사실 20세기에는 잘 먹혔던 성공방식이다.

McDonald Co. 창립자 레이 크록(Ray Kroc)는 제어할 수 없는 야망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 주택 담보 대출 자금, 부동산 제공권, 브랜드 로열티, 밀크 쉐이크 파우더  등 본인의 야망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지 집어 삼킨다. 집어삼킨 것들을 토대로 그는 그의 사업을 키우고 야망을 다시금 더욱 키워나간다. 기업으로선 최상의 선순환구조이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타인의 행복, 가정의 평안, 신의성실성, 전통적인 가치관 또한 집어 삼켜버린다. 야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것들은 모두 희생되는 것이다. 개인으로선 최악의 악순환구조이다.

크록은 전자를 선택했다. 본인의 야망을 위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부담했다. 본인의 선택이니 비판할 수는 없다.

솔직히, 나라도 전자를 선택한다. 기업을 창립해 본인의 ‘공화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그것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준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자본의 힘을 행사하는 것은 그만큼 정복감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희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인으로서의 행복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치열한 경쟁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야망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망만을 향해 달려온 크록의 개인적 감정 또한 영화 말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재혼한 아내, 과장된 성공신화, 만들어진 인맥, 배낀 연설문들 위에 그가 존재한다. 본인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남모르게 체념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매드맥스(Mad Max, 2017)


희망이 결여된 사회를 살아가는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표현은 극적이지만, 매드맥스는 희망없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답을 제시한다.

핵전쟁 이후, 기본적인 자원들이 부족에 시달린다. 물, 식량, 석유와 같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당연히도 도덕과 윤리는 저변에 잊혀진다. 사람을 납치해 피주머니(주인공)로 사용하고, 여자들을 모유 생산용으로 감금하는 등 상상 밖에 일들이 이루어진다.

권력의 독점도 이루어진다. 자원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제왕적 권력을 쥐는 형태로 말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도 개발해낸다. 권력자를 숭배하고 충성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형태로서 말이다. 권력자의 이름서부터 이모탄 조(Immortan Joe), 즉 ‘영생하는 조’이다. 진정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다.

현실은 이렇게 극적일리가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의 이야기는 아니다. 기아난민을 제외한 우리에게 자원의 부족이 절대적 빈곤을 야기하지는 않고 있다. 다행히 도덕과 윤리는 사회의 합의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권력의 독점도 민주주의로 해소되고 있다. 매드맥스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는 그저 재미를 위한 것뿐이다.

매드맥스가 실로 전하고자 하는 가치는 희망의 중요성이다. 연명하던 사람들에게 녹색의 땅은 그들의 희망이었다. 비록 허구로 밝혀졌지만, 새로운 희망을 계속 꿈꾸며 의지를 굳혀 목표를 수립해 나간다. 또, 워보이들에게는 명예롭게 자폭해서 발할라로 가는 것만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물론 이모탄 조와 그의 사이비 종교의 허구지만, 그래도 그 희망 하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어떤 희망이 되었든간에, ‘행동에 대한 동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희망이다’는 점을 영화가 직접 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영화] 컨택트(Arrival, 2017)

http _movie.phinf.naver.net_20170123_196_1485136184749Qy5Y1_JPEG_movie_image.jpg

컨택트에 우주선(쉘)과 외계인(옥토포드)는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물리학적인 관점이든 언어학적인 관점에서든 말이다. 그들은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무언가인 것이다. 사람들은 역시나 그들을 경계적인 태도로 대한다. 다른 관점을 가진 이와의 소통은 대립되는 의견에 의한 갈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상에서는 경계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들을 무능력한 존재로서 묘사한다. 하지만, 그들이 영화에서 묘사한대로 비난의 대상인지는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이다. 소통에 있어서도 최대한 보수적인 태도로 불확실성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불확실한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오히려 주인공의 영화 상의 극적인 소통 방식이 실패하였다면, 그녀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컨택트는 비단 불확실성의 존재와의 소통 과정 뿐만 아니라, 사람 간의 소통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다. 영화상에서 사람들은 본인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간의 소통을 단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도 본인의 의견을 공고히하여 상대방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흔히 벌어지는 일들이다.

문제는 소통의 부재가 자기당착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본인의 의견이 검토되어야만 올바른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은 대립되는 의견에 의한 갈등을 필연히 야기한다. 대립과 갈등은 본인의 목표도달을 방해하기에 단절로 이어진다.

소통의 필요성은 누구나 강조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단기적인 이권을 침해하는 소통을 얼마나 옹호할지는 의문이다. 소통을 이권을 위한 전략이자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