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장병규의 스타트업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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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내 마음 속에 스타트업 창업에 대한 꿈이 있다. 아니, 다들 한번씩 자기 사업을 차려보는 꿈이 있을듯 싶다. 조직의 리더가 되어,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생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꿈만 꾸거나 참담할 정도로 실패하고선 빚을 얻고 끝낸다. 물론 나만큼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만, 다들 그렇게 망상하면서 행복회로를 돌리다 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역량과 성격을 생각해보면 실패할듯 싶고…뭐 그렇다. 정말 하고싶지만 실패가 두려워 물러나는 것이 스타트업이다.

그런 스타트업 업계에서 장병규 의장은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다.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고선, 네오위즈를 시작으로 수많은 스타트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대박신화를 이끌어왔다. 그 결실이 바로 블루홀 스튜디오의 PUBG, 우리가 아는 배틀그라운드이다. 그 덕에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에 위원장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

책에서는 스타트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부터 장병규 의장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담겨져 있다. 특히 기존에 실리콘벨리에 맞춰져있던 스타트업 기본서에서 벗어나, 한국 스타트업의 생태계를 잘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건 스타트업의 3가지 역설적인 진실을 논하는 부분이다.

먼저, 스타트업의 성공은 비정형적이다.
사람들은 스타트업의 성공 비법을 찾아나서지만, 정작 그런 성공 방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성공한 스타트업들의 성공 방식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사후적인 해석일 뿐이다. 장병규 의장에 말을 빌리자면, 스타트업은 ‘저마다의 스토리에 따라서 성공한다.’ 그러니 각자의 비전을 가지고 알아서 살아남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스타트업의 평균은 실패다.
스타트업의 성패도 정규분포를 따르는데, 약 20% 정도만 그럭저럭 성공하고 1%만이 초대박을 누린다. 학교 등급으로 치면 3등급 안에 들어야 본전이고, 전교 1~3등해야 전설이 될 수 있다. 심지어 하위 10%는 심한 실패를 하는데, 연대보증으로 대표가 파산하거나 재기불능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그러니, 평균이 실패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고 스타트업을 하지 말아야할 이유도 없다. 스타트업이 실패한다 해서 구성원의 인생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은 그 특수성 때문에, 단기간 내에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여 발휘할 수 있다. 정말 실패를 하더라도 배울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그러니 망하더라도 ‘적당히’ 실패하고선 배운 지식으로 재도전을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지막, 스타트업 창업자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스타트업은 다양한 일들을 맞닥뜨리게 되고, 대부분 기존의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상황에서는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입하는게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 어짜피 새롭게 다가올 난관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이런 길을 걸으면서, 창업 1~2년만에 사업계획 단계에서는 상상도 하지않은 일들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다보면 성과가 나온다는게 장병규 의장의 이야기이다.

스타트업이라면 당연할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조언들이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하나씩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뛰어들 때, 기존의 성공 방식은 먹히지도 않고, 잘해봐야 본전이며, 하루하루 맞닥뜨린 일을 처리하다 시간을 보낼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스타트업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다시한번 고민의 기회를 주는 역할도 준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의 임직원들도 50대에 퇴직이 기본인  ‘평균이 실패’인 세상에 살게 되었다. 참 독특하면서도 당연하게 평생 직장에 집착하는 한국인 만큼, 공무원이 모두가 꿈꾸는 직장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일부는 공직자로써 국가 정책결정에 뜻이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평생 먹고 살 자리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중에도 내면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이 첫걸음이자 스타트업 101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도서] 새로운 디지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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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번은 이 책을 다른 교실에 두고 온 적이 있었다. 책을 찾으러 갔더니 여자애가 책 내용을 조금 봤다며 했던 말이 ‘되게 심오한 책이다’라는 말이였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면, 심오한 내용이 맞긴하다.

일단 책에 대해 소개하자면, 전직 구글 대표이사인 에릭 슈미츠(Eric Schmidts)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담아둔 미래지향적인 책이다. 참고로 이사람, 우리가 매일 접하는 구글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설계한 사람이다. 공동저자인 제러드 코언 또한 국무부에서 라이스와 클린턴의 정책보좌를 맡은 인물이다.

책에서는 과거 사례를 통해 에릭 슈미츠와 제러드 코언의 디지털 시대에 관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감옥에서의 휴대폰 사용 실태에서 아랍 민주화 혁명까지, 본인들이 관찰하였던 사건들에서 디지털 기술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래에 디지털 기술이 활용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시나리오는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정부, 테러리스트, 시민단체, 기업 등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디지털 기술의 우위를 점하고자하는 이들의 모습이 먼저 비춰진다.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의 기회가 곧 권력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권이 충돌하는 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이러한 갈등의 양상은 시민감시, 사이버 테러리즘, 편향적 마케팅, 시민단체 역선택, 기업의 수익독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대할만한 구석도 있다. 현실세계에서 입지가 좁은 이들에게 가상세계의 연결성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아랍 민주화 혁명 당시, 트위터를 비롯한 SNS 서비스들이 연결성의 위력을 증명해보였다. 앞으로는 현실세계에서 박해받는 민주화 및 인권 운동가들이 대표적인 연결성의 수혜자들이 될 것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디지털 시대’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오히려, 강화되는 이권 충돌과 갈등 속에 누가 우위를 점하는가가 관건이란 생각이 각인되었다. 저 기회를 잡기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되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영화] 스노든(Snowde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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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부당한 정보수집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전기 영화다. 스노든이 미국, 일본, 하와이, 홍콩에서의 활동들과 그 이면에 숨겨진 사랑과 도덕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폭로에 이르기까지 행했던 다양한 정보수집 활동들의 위법성 또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규제되지 않은 권력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국가안보국을 향한 미약한 규제는 그들이 음지에서 국가 권력의 칼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XKeyscope와 같은 초법적 감청 프로그램들은 간단한 사후 승인만을 필요로 했고, 이 것은 해외정보감시법원(FISC)의 거수기 역할로써 합법화 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 권력은 광범위한 시민 감시를 통해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면서도 합법화 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의 무결을 주장하며 광범위한 시민감시를 옹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인에게는 합법적이지만 숨기고자 하는 사생활이 모두 존재한다. 그냥 가볍게 생각해봐도, 본인이 옷 갈아입는 영상을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이건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인격체로써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 권력이 개개인의 합법적인 사생활을 파해쳐 몰래 보고있는 것은 ‘국가 안보 수호’가 아니라 ‘스토킹’이다.

더하여, 국가기관들은 종종 ‘더 큰 공익’을 위해 개개인의 작은 사생활 희생하는 거래를 하는 것 뿐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생활 침해를 대가로 국가 안보를 보장받는다는 거래에 관해 통지받은 바가 없다. 거래 상대방에 대한 통지도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국가 안보를 보호하고 싶었다면, 일련의 거래에 관해 시민들에게 법안 상정나 개정시에 매스컴에 통지하였어야 했다. 이를 통해 적절한 견제를 통해 조율을 과정을 거쳤어야만 한다.

얼마전, 우리나라의 ‘테러방지법’이 국가정보원의 초법적 정보수집 활동을 용인하는 것인가에 대해 법안 발의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견제과정을 거쳐 일부개정이 이루워져 발의가 되었다. 이는 서로 간의 통지와 조율과정이 있었음을 의미하고, 국가정보원 또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국가 권력 행사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미세한 국론 분열은 남아있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의 폭로 행위를 넘어,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가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결국은 사람이 잘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안보가 위협당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자유가 위협당해선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 중간점을 찾아나가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스노든의 폭로는 안보에 과도하게 쏠린 불균형을 깨트리고자 했던 일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 파운더(The Founder, 2017)

 

the founder pos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If I saw a competitor drowning, I’d shove a hose down his throat.”
“내가 만일 경쟁자가 익사하는걸 본다면, 난 그의 목에 호스를 꽃을꺼야.”

사실, 영화를 본지 한달이 된 시점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그저 영화를 보며 느낀걸 두서없이 써봐야겠다. 차라리 이런 영화평이 쓰기에도 편하고 솔직한 편이다.

영화 <파운더>는 20세기 사회에서의 성공담을 담았다. 성공담은 ‘역경을 이겨내 승리를 쟁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데, <파운더> 역시 동일하다. 끝없는 야망으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은 창업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진부할수도 있는 전개이지만, 사실 20세기에는 잘 먹혔던 성공방식이다.

McDonald Co. 창립자 레이 크록(Ray Kroc)는 제어할 수 없는 야망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 주택 담보 대출 자금, 부동산 제공권, 브랜드 로열티, 밀크 쉐이크 파우더  등 본인의 야망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지 집어 삼킨다. 집어삼킨 것들을 토대로 그는 그의 사업을 키우고 야망을 다시금 더욱 키워나간다. 기업으로선 최상의 선순환구조이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타인의 행복, 가정의 평안, 신의성실성, 전통적인 가치관 또한 집어 삼켜버린다. 야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것들은 모두 희생되는 것이다. 개인으로선 최악의 악순환구조이다.

크록은 전자를 선택했다. 본인의 야망을 위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부담했다. 본인의 선택이니 비판할 수는 없다.

솔직히, 나라도 전자를 선택한다. 기업을 창립해 본인의 ‘공화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그것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준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자본의 힘을 행사하는 것은 그만큼 정복감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희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인으로서의 행복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치열한 경쟁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야망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망만을 향해 달려온 크록의 개인적 감정 또한 영화 말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재혼한 아내, 과장된 성공신화, 만들어진 인맥, 배낀 연설문들 위에 그가 존재한다. 본인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남모르게 체념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매드맥스(Mad Max, 2017)


희망이 결여된 사회를 살아가는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표현은 극적이지만, 매드맥스는 희망없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답을 제시한다.

핵전쟁 이후, 기본적인 자원들이 부족에 시달린다. 물, 식량, 석유와 같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당연히도 도덕과 윤리는 저변에 잊혀진다. 사람을 납치해 피주머니(주인공)로 사용하고, 여자들을 모유 생산용으로 감금하는 등 상상 밖에 일들이 이루어진다.

권력의 독점도 이루어진다. 자원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제왕적 권력을 쥐는 형태로 말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도 개발해낸다. 권력자를 숭배하고 충성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형태로서 말이다. 권력자의 이름서부터 이모탄 조(Immortan Joe), 즉 ‘영생하는 조’이다. 진정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다.

현실은 이렇게 극적일리가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의 이야기는 아니다. 기아난민을 제외한 우리에게 자원의 부족이 절대적 빈곤을 야기하지는 않고 있다. 다행히 도덕과 윤리는 사회의 합의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권력의 독점도 민주주의로 해소되고 있다. 매드맥스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는 그저 재미를 위한 것뿐이다.

매드맥스가 실로 전하고자 하는 가치는 희망의 중요성이다. 연명하던 사람들에게 녹색의 땅은 그들의 희망이었다. 비록 허구로 밝혀졌지만, 새로운 희망을 계속 꿈꾸며 의지를 굳혀 목표를 수립해 나간다. 또, 워보이들에게는 명예롭게 자폭해서 발할라로 가는 것만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물론 이모탄 조와 그의 사이비 종교의 허구지만, 그래도 그 희망 하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어떤 희망이 되었든간에, ‘행동에 대한 동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희망이다’는 점을 영화가 직접 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영화] 컨택트(Arriva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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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에 우주선(쉘)과 외계인(옥토포드)는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물리학적인 관점이든 언어학적인 관점에서든 말이다. 그들은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무언가인 것이다. 사람들은 역시나 그들을 경계적인 태도로 대한다. 다른 관점을 가진 이와의 소통은 대립되는 의견에 의한 갈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상에서는 경계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들을 무능력한 존재로서 묘사한다. 하지만, 그들이 영화에서 묘사한대로 비난의 대상인지는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이다. 소통에 있어서도 최대한 보수적인 태도로 불확실성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불확실한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오히려 주인공의 영화 상의 극적인 소통 방식이 실패하였다면, 그녀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컨택트는 비단 불확실성의 존재와의 소통 과정 뿐만 아니라, 사람 간의 소통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다. 영화상에서 사람들은 본인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간의 소통을 단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도 본인의 의견을 공고히하여 상대방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흔히 벌어지는 일들이다.

문제는 소통의 부재가 자기당착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본인의 의견이 검토되어야만 올바른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은 대립되는 의견에 의한 갈등을 필연히 야기한다. 대립과 갈등은 본인의 목표도달을 방해하기에 단절로 이어진다.

소통의 필요성은 누구나 강조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단기적인 이권을 침해하는 소통을 얼마나 옹호할지는 의문이다. 소통을 이권을 위한 전략이자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만 말이다.